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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한번 잡숴봐

일단 한번 잡숴봐: 아이덕후의 힐링 고백



2월 중순. 아직 겨울이지만 봄이 멀지 않았다 설렐만도 한 때인데 날씨는 여전히 들쑥날쑥하네요. 역시 봄은 아직도 멀었나 싶습니다. 이주간 다들 무사평안 하셨는지요. 저는 이달 말에 나름 중요 일정이 잡혀서 말 그대로 날 받아놓고 사는 모드로 근근히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래도 한 번 시작한 장사를 쉬이 거두어서는 안 되는 법. 오늘도 챙겨온 장물을 주섬주섬 내놓으며 장사 시작하겠습니다.

사실 이번에는 어떤 물건을 선보일까 망설임이 많았습니다. 예전 장물을 내놓자니 물건의 우수성을 제대로 풀기 위해서는 그 성능을 자체적으로 다시 검토하는 것이 손님에 대한 예의인데, 앞에서 말씀 드렸듯이 날 받아놓은 모드라 시간을 만들기가 – 사실은 시간이 아닌 마음의 여유이겠지만요 – 쉽지 않더군요. 또한 같은 이유로 한동안은 새로운 장물을 접할 시간도 없었던지라 지난번처럼 딱히 꽂히는 장물을 여간 찾을 수 없어서 이리저리 고민을 좀 했더랍니다. 

하지만 때로는 우연과 충동에 몸을 맡길 때도 있어야하는 법. 모든 것은 오늘 낮, 한 주의 생필품을 마련하기 위해 마트로 향하는 길에 시작되었습니다. 제가 공산품 등을 주로 구매하는 대형 마트에 가기 위해서는 마트에서 운행하는 셔틀버스를 타야 하는데요. 오전에도 이래저래 처리해야할 일이 있었던 지라 서둘러 점심 한 술 뜨고 부랴부랴 내달려 버스 끄트머리에 겨우 올라탈 수 있었지요. 버스 안에서 가쁜 숨을 가다듬으며 서 있는데, 갑자기 정체를 알 수 없는 열기 혹은 온기가 제 왼쪽 다리, 정확히는 발끝부터 허벅지 1/3  지점 정도까지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인가. 무엇이 이리도 강렬하게 온기를 내뿜는 것인가 싶어 왼쪽을 봤는데 그곳에 서있는 젊은 여성은 거리를 가늠해 보았을 때 열기 폭발 울트라 소머즈가 아닌 이상 그런 온기 전달은 불가능해 보였지요. 그래도 이상하다 싶어 더 자세히 봤더니, 그 젊은 여성과 저의 왼쪽 다리 사이에 무려, 젊은 여성의 아이로 추정되는 아동이 매우 근접한 거리에서 저를 향해 그 충만한 온기를 내뿜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동이란, 어린 아이란, 그런 것입니다. 그렇게 작은 체구임에도 불구하고 열등히 높은 체온을 유지하며 그 온기와 매력을 사방에 분출함으로써 여러면에서 열세일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생명을 존속해나가는 존재. 그리고 맞습니다. 저는 어린아이, 특히 영유아 및 약 10세 이하 가량의 아동이라면 사족 못 쓰는 이른바 (적합한 호명인지 모르겠으나) 아이덕후입니다. 이런 제가 오늘 내놓는 물건은 제가 (벌써!) 지난 1년간 꼬박 챙겨서 시청하고 있는 ‘아빠 어디가’와 ‘슈퍼맨이 돌아왔다’ 입니다. 


약장수 포인트 하나. 

저 같은 아이덕후에게 있어 이 방송들이 이른바 힐링까지 될 수 있는 이유는 다른 모든 요소를 차치하고 아이들을 한 시간 내내, 그것도 어찌나 다들 너무도 미적으로 아름답기까지한- 이것이야 말로 유전자의 힘인가 라고 저는 솔직히 방송을 볼 때마다 절감하는데요- 아이들을 마음껏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작고 따뜻하고 부드럽고 약하지만 에너지가 넘치고 심지어 아름답기까지 한 그 생물체들을 줄곧 보고 있노라면, 그리고 저도 모르게 그 아이들이 지니고 있을 온도와 감촉을 기억해내게 된다면, 저처럼 차갑고 팍팍하고 고립된 일상을 보내는 아이덕후에게 이보다 더한 힐링은 없게 되는 것이지요. 

아니, 조금 더 솔직해지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보는 것만으로’ 입니다. 주변의 양육자들, 주로 친족들을 통해 저는 출산과 육아가 말 그대로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알만큼은 알고 있습니다. 모든 일에는 얻는 것과 잃는 것이 있고 결국은 그 둘의 저울질에 따른 선택의 문제가 되겠지만, 제 저울 상의 계산으로는 여전히 출산과 육아는 모든 면에서 엄청난 용기를 수반하는 말 그대로 대단한 ‘결심’이 필요한 일이라고 느껴집니다. 게다가 저처럼 사회경제적인 성장 속도가 느린 혹은 열후한 축에 속해서 내 한 몸의 (사회경제적) 독립과 생존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경우에,  출산과 육아라는 선택지는 이미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허구의 것일지도 모르지요. 그만큼 출산과 육아는 물적-심적-경제적 자원과 노동이 일방적으로 투입되어야 하는 실로 엄청난 일입니다. 방송에서도 물론 비록 극히 일부분, 특히 일상이 아닌 비일상적 상황 설정에 의해 그 내용과 성격이 많은 부분 변형된 형태이긴 하지만 육아에 투입되는 엄청난 양의 노동이 일부 드러나기는 합니다. 하지만 브라운관 너머의 저는 그러한 일절의 자원과 노동을 투입하지 않은채, 게다가 편리한 편집과 자막을 통해 적당한 웃음과 귀여움으로 포장된 양육자와 아이들의 극히 일부의 현실 생활을 보기만 하며 힐링까지 운운하는 것은 어쩐지 말해놓고도 부끄럽긴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간접적인 거짓 충족이 건강하지 않다고, 사실은 생각합니다. 너무 편리하고 자위적으로 대상을 소비하는 것으로 마치 저의 욕망이 충족되고 현실을 향한 개입이 이루어졌다고 착각해서는 안되잖아요. 그리고 이러한 경향이 단지 저 같은 아이덕후 독거인의 아이 사랑에 관해서만 아니라 다른 현실 문제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되풀이되고 있지 않나 하는 우려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현실적 답답함을 대체해줄 해방적인 상황 혹은 자신의 욕구를 대리 충족해주는 주체가 등장하는 영화를 보며 해방감을 느끼지만, 그것으로 끝. 영화관을 나서 현실 문제에 있어서는 쉬이 몸을 움직이지 않는 그런 상황 말입니다. 이것은 현실 정치 상황이 갑갑해질 수록 진보적인 메세지를 가진 영화들이 흥행에 성공하는 사례가 빈번해지지만 스크린 바깥 현실은 점점 악화되기만 하는 수년간의 상황을 보면서 가지게 되는 복잡한 심경이기도 합니다. 


약장수 포인트 둘.

자아. 이야기가 다른 방향으로 좀 벗어난 것 같은데 스리슬쩍 두 번째 포인트로 넘어가보실까요. 개인적으로 이 방송들이 매우 적절한 선택을 했다고 생각하는 점은 두 가지 정도입니다. 이는 아이들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서 시작부터 메리트를 얻는 것과 동시에 조금 틀어졌다가는 훨씬 강력한 사회도덕적 비난을 면하기 힘들다는 디메리트 또한 가지게 되는 이들 방송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이유라고도 여겨지는 부분인데요. 먼저 방송에서 부각되는 양육자가 남성이라는 점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굳이 길게 말씀드리지 않아도 되겠지요. 남성이 양육, 특히 그에 직접적인 형태로 투입되는 물리적 시간과 노동에 있어 적극적으로 자신의 소임을 다하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일 뿐만 아니라 남성 양육자 자신과 아이들 모두에게 실질적으로 매우 큰 이익이 된다는 것은 아마 모두 동의하실 것입니다. 주위의 양육자들의 경우를 보면, 양육자라는 역할을 자신의 역할 중 하나로 선택한 후 원치 않게 부과되는 성역할, 그리고 성별에 의해 차등적으로 요구-기대되는 자원/노동의 종류와 정도가 육아를 힘겨운 것으로 만드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되는 듯 하더군요. 그러한 현실 상황을 일부분이나마 개선해보고자 하는 의지가 방송을 통해 구현된다는 점은 참으로 바람직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게다가 방송적으로도, 여성 양육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시간과 노동을 직접적으로 할애하는 것으로 간주되고 따라서 아이를 상대하는 기술이 덜 발달되기 쉬운 남성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들에게 익숙해지고 그 기술을 연마해가는 과정을 보는 것은 종류를 막론하고 인간의 성장을 볼 때 느낄 수밖에 없는 감동이라는 것을 제공하고야 말지요. 그 과정에서 아이와 서로에게 익숙해지고 애착감을 키워가는 모습이 보인다면 이건 뭐, 막말로 그냥 누워서 시청률 따먹기 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이 방송들의 다른 적절한 선택은 기본적인 상황 설정과 같은 방송의 큰 틀을 규정하는 것 이외의 적극적인 개입을 자제하고 관찰의 시점을 택하려는 자세와 그 연장선에서 다양한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의 아이들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대개 양육자와 함께 나오는) 아이들의 ‘토크쇼’는 정말 최악이라고 생각하는데요. 뭐라고 해야할까, 만들어진 세팅 안에서 경쟁과 과장의 화법을 강요하는 것도 싫고 – 이 점은 다수의 어른 출연자가 나오는 동일한 포멧의 토크쇼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 말보다는 상황으로 그들의 삶을 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기도 하겠지요. 아무튼 일정의 개입과 통제는 이루어지지만 – 그리고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이것이 이 방송을 ‘볼 만 한 것’ 혹은 ‘보아서 즐거운 것’으로 탈바꿈시키는 매우 결정적인 장치라는 함정이 있기는 하지만 – 아이들의 상황, 특히나 타인과의 상호 작용을 보는 것은 정말 흥미진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 아이들이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행동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물론 저 자신에 대한 것 또한 포함해서 정말 여러가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데요. 특히나 우리가 흔히 아이들을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존재라고들 하지만 사실을 얼마나 세상의 때, 특히 양육자의 때가 묻기 쉬운 존재들인지 새삼 놀라곤 합니다. 그렇게 인간은 각종 때묻힘을 통해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이른바 사회적인 존재가 되어가는 것이겠지요. 한편으로는 그래서 때묻지 않는다는 것은 단지 그 접촉의 적음의 문제라기보다는 의식적으로 경계하고 덜어내야하는 노력의 문제구나 라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아이들은 또 어쩜 그리도 다들 다른지요. 정말 볼 때마다 혀를 내두르게 될 정도입니다. 그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다른 아이들이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다르게 행동하고 또 다른 모양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뭐 저 또한 매일의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부단하게 취하고 있을 행동들이긴 하지만, 브라운관 너머에 자리를 잡고 앉아 그것도 감정이며 행동이 상대적으로 더 직접적인 아이들을 통해 보고 있자니 여러가지로 복잡해지곤 하는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 보세요

사실 오늘은 어쩐지 이야기도 중언부언, 급기야 어설픈 자기 반성과 비판까지 끼어들어서 과연 장사가 제대로 될 지 자신이 별로 없습니다. 거듭된 언급으로 이제는 민망하기까지 하지만 어쨌든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없는 상태에서 물건 검토를 충분히 하지 못한 탓이 사실은 제일 클 겁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 방송 자체가 저같은 아이덕후를 비롯 꽤 많은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동시에 여전히 여러가지로 동의될 수 없는 요소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를테면 방송에서 당연한 전제로 설정한 이성애 결혼과 혈육관계를 기반으로 한 양육자-아이의 관계라는 세팅은 어떤 식으로든 방송을 통해서 현실에서도 더욱 강화될 것이고, 그와는 다른 세팅의 삶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 개인-감정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을테니까요. 갈대처럼 흔들린 오늘의 장사를 정리하면서 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 보세요, 라고 조심스럽게 말씀드리고 싶네요. 무언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선택하려면 역시 직접 보고 경험하는 수 밖에 없으니까요. 저도 다음 장사에서는 더 자신있게 권할 수 있는 물건을 들고 올 수 있도록 더 많이 보고 듣고 경험하겠다는 다짐을 하면서, 이만 물러갑니다. 안녕히 계세요.